1999. 1. 『한국의 지식 게릴라』- 『현대사상』 특별중간호, 민음사


정보화 시대에 여전히 옛 것을 돌아보는 이유


김   현



1.


  보스턴의 옌칭 연구소 도서관에서 송준호 교수의 문과 방목(文科榜目)1) 데이터베이스 작업을 돕는 동안 있었던 일이다. 송 교수는 책상 위에 산처럼 쌓아 놓은 조선시대의 읍지(邑誌)들을 들춰가며, 그 문서의 곳곳에 삽화처럼 들어간 효자 열부, 충비(忠婢)들의 이야기를 설명해 주었다. 문득 예전에 읽은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2) 속의 일화가 생각나 이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주었다. 18세기말에서 19세기초로 추정되는 조선 후기의 일이다.


  충청도 영동에서 온 부부가 서울의 한 선비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였다. 주인집 아들이 『사기(史記)』를 배웠는데 선생이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는 말을 풀이해 주자 여자가 아궁이에 불을 때다가 그 말을 들었다. 날이 저물자 여자는 서당 선생을 찾아갔다.

  “낮에 말씀하신 글은 제가 여태까지 들어보지 못한 것입니다. 자세하게 가르쳐 주소서.” 서당 선생이 재차 설명을 해 주자, 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사람의 도리를 이제야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나와서 남편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여태까지 여자가 지켜야 할 도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들었습니다. 그러니 오늘부터 헤어집시다.”

  여자는 개가하여 지금의 남편을 따라온 것이었고, 둘 사이에는 이미 젖먹이 아이까지 하나 두고 있었다. 남편은 눈이 휘둥그레져 까닭을 캐물었다. 여자의 대답인즉 이러하였다.

  “전날 당신을 따랐던 것은, 여자란 지아비를 잘 섬기면 그만이라고 알았기 때문인데, 오늘에야 두 남편을 섬길 수 없다는 도리를 알았으니, 이제부터 몸을 깨끗이 지켜 돌아가신 남편에게 보답해야겠습니다. 당신 아들은 어려서 품에서 떼 놓을 수가 없으니 몇 년을 기른 뒤 데리고 가십시오. 그러면 당신에게 충분히 보답이 될 것입니다.”

  남편이 노하여 욕을 퍼부으며 마구 때렸으나 여자는 자기 뜻을 돌이키지 않고 주인집으로 달려갔다. 주인집에서도 자초지종을 듣자 기특하게 여겼다. 그 후로 드나들 때면 남편과 길을 피해 다녔고 싸늘한 태도가 얼음장 같았다.


  같은 유형의 이야기를 수백, 수천 건도 더 읽고 들었을 그였건만, 송 교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또다시 눈에 눈물이 도는 것 같다고 하였다. 그의 말에 나도 십분 공감하였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독자들은 웬 시대착오적 우스개소리냐고 힐난할지도 모르겠다. 송 교수와 내가 이 이야기를 놓고 숙연해 했던 것은 조선시대 촌부의 순박한 도덕심에 감동해서가 아니다. 인간을 신분으로 등급 지우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신분과 신분 사이에 견고한 벽을 세웠던 우리의 전통시대 사회의 최하층에 속했던 한 여인이, 그 벽의 틈새를 헤집으며 남편과 자식마저 버리고 상층부를 향해 기어오르고자 한 그 처절한 노력에 가슴 저미는 연민의 정을 느꼈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인들은 저마다 양반의 자손인 양 행세하지만 17 세기 이전을 기준으로 말할 것 같으면, 국민의 80-90%는 선계의 혈통을 알지 못하는 상민이나 노비였다. 그 시대의 하층민이 상층 양반의 전유물인 권력과 지위를 넘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양반들의 전유물 중에서 하층민들이 넘볼 수도 있었던 한 가지가 바로 예의와 염치라고 하는 양반 집단의 자율적 규율이었다.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이상, 나에게 허용되지 않은 부와 권력을 욕심낼 수는 없다. 그러나 예의와 염치, 그것은 경우가 다르다. 그것을 나의 것으로 하는 데 제재가 없을 뿐 아니라, 격려와 칭송이 따른다. ‘인간의 도리’를 준행하는 것. 그것은 관념의 세계에서나마 나의 신분을 그 사회 최고의 수준으로 격상시켜 양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열린 틈새’였다. 그 틈새를 비집고 올라가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물론 ‘나도 저들과 같은 인간’이라는 정신적인 자부심이었다. 그러나 그 정신적인 자부심은 결국 자신의 현실까지도 그에 부합하는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의 동인이 되었다.

  18세기 이후 조선 후기 사회에 몰아친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는 신분제도의 붕괴이다. 반상(班常)의 구별이 모호해졌다고 하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로 제시되는 것이 일인학자 시카다 히로시(四方博)의 대구지방 호적 분석이다. 17세기말(1690) 이 지방의 호구 조사에서 9.2%, 53.7%, 37.1%였던 양반 호(戶), 상민 호, 노비 호의 비율은 19세기 중반(1858)에 오면 70.3%, 28.2%, 1.5%의 비율로 변화한다. 물론 이 수치만으로 근대화 이전에 한국인의 70%가 이미 양반으로서의 평등한 지위에 도달했다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양반들 사이에서도 관향(貫鄕)을 나누고, 파를 나누고 집락(集落)을 형성하여 자기들만이 진짜 양반이라고 차별화 한 그 사회에서 신분의 벽은 그렇게 쉽게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호적의 통계 속에는 나름대로의 분명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국민의 대다수가 남이 인정하든 안하든 스스로 양반처럼 행세하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조선시대의 하층민들이 지향해간 목표가 자신들을 억압해 온 양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도 그 양반 집단의 일원이 되려 했다는 점이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조선시대의 지배 계층인 양반 사대부들은 무능하고 부패한 구석을 오백 년 역사의 도처에 노정시키는 가운데에도 피지배계층이 감히 정면에서 적대할 수 없게 하는 효과적인 자기 보호의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도리를 부지하는 존재’라고 하는 명분을 점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전근대 농경사회에서 인간의 지혜로 도달할 수 있는 온갖 바람직한 삶의 원리들을 집성하여  단단한 윤리설을 정립하고, 그것을 예절이라고 하는 실천 규범으로 형상화하여 정교(政敎)와 일상생활에 연출하였다. 조선이라고 하는 땅덩어리를 무대로 오백년의 긴 시간 동안 공연된 그 연극에 양반 사대부들은 스스로 주연의 역할을 담당하였지만, 중요한 사실은 중인 서리나, 상민이나, 심지어는 노비들까지도 그 연극의 조연으로 초대되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무대 뒤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대립의 실상이 어떠하였든 간에, 무대의 전면에서 연출되는 주제는 고귀한 도덕 원리를 상하가 공유하는 조화와 화해의 삶이었다. 너무나 잘 짜여진 연출이었기에 조연들은 주연의 자리를 선망하고 그것을 탐할지언정, 무대의 판을 뒤엎을 생각을 하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현명한 선택이기도 했다. 어쨌든 우리 한국인들은 서로의 목을 자르고 피를 뿌리는 신분간의 극한 대립을 경험하지 않고서도 신분제라고 하는 전근대의 인습을 소멸시키는 위업을 달성했으니 말이다.

  조선시대에 가장 대립적인 관계에 있었던 양반과 노비의 화해를 주제로 한 다음의 이야기는 야담집 속의 한 조각 픽션이지만, 정사(正史)의 기록들이 전하지 못하는 진실을 설명해 준다.


 늙은 재상 부부의 집에 어린 계집종이 있었다. 하루는 계집종이 부인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대감께서 저와 잠자리를 같이하려 하십니다. 제가 계속 거절하면 대감의 미움을 사 죽을 것이요, 그 분부를 따르면 저를 딸처럼 대해 주신 부인의 은혜를 저버리게 될 것이니 어찌하겠습니까? 강물에 빠져 죽을 도리밖에는 없습니다.”

  부인은 놀라고 측은히 여겨 몇 가지 패물과 의복을 싸 주며 말했다. “이 집을 떠나 멀리 도망가서 살아라.”

  이른 새벽 몰래 집을 나선 계집종은 정처없이 걷다가 어느덧 강가에 이르렀다. 망연히 물살을 바라보고 있는데 등뒤에서 말방울 소리가 들렸다. 말을 타고 나타난 남자에게 소녀는 자신의 기구한 처지를 이야기하였다. 남자는 계집종을 자신의 말에 태우고 어디론가 떠나갔다.

  세월이 흘렀다. 재상 부부는 모두 세상을 뜨고 집안은 크게 기울었다. 아들마저 돌아가 손자가 집안을 이끌어야 했지만, 남은 가산이 없어 살아갈 방도가 막막하였다. 그의 손에 남은 것은 각처에 흩어져 있는 노비들의 문서. 그는 노비들을 찾아 여러 해 끊긴 몸값을 받아내면 의지할 만한 자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젊은 양반은 단신으로 선대의 노비들이 사는 마을을 찾았다. 노비문서를 보이며 신공(身貢)을 요구하는 그의 면전에서 노비의 후손들은 겉으로는 공손히 응대하였지만 속으로는 분노하였다. 밤사이에 죽일 작정으로 양반에게 그들의 집에서 묵을 것을 청하였다.

  창문 너머의 웅성거림에 잠을 깬 양반은 목숨이 위태로움을 눈치채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노비들은 칼과 몽둥이를 쳐들고 쫓아왔다. 그들에 죽게 되려는  순간 난데없이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양반의 옷깃을 물고 달아났다. 노비들은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양반을 제거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혼절해 있다가 정신을 차린 양반은 자신이 어느 집 앞 우물가에 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날이 밝아 사람들이 놀라서 몰려오자 호랑이는 유유히 사라졌고, 괴이하게 여긴 사람들은 젊은이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 집안의 노부인이 멀찌감치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용모를 응시하다가 젊은 양반을 안채로 들어오게 한 후 말하였다. “당신의 어릴 적 이름은 아무개가  아니시오?”  놀라는 양반에게 노부인은 자신의 출신을 밝혔다. 그 여인은 양반의 조모가 도망시킨 자기 집안의 계집종이었다.

  노부인은 자기 자식들을 불러 모아 젊은 양반과의 관계를 밝히고 그에게 상전에 대한 예의를 갖추게 했다. 집안의 자제들은 풍채도 좋고 재산도 많아 한 고을을 호령하는 자들이었건만, 갑자기 노모가 자기들을 노비의 자식이라 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분노한 형제들은 양반을 죽여 그 사실이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고 작정하였다.

  그날 밤, 자식들이 잠든 후 노부인은 양반에게 다가가 은밀히 말하였다. “낭군께서는 제 자식들의 기색을 보지 못하였습니까? 그들은 반드시 당신을 해칠 것입니다. 저에게 화를 피할 수 있는 계책이 있는데 따르시겠습니까?” 양반이 두려워하며 그것이 무엇인지 되묻자, 노부인은 이렇게 답하였다.

  “저의 손녀와 결혼하십시오.”

  양반은 주저하였으나, 노부인은 다른 방법이 없음을 상기시키며 재차 재촉하였다. 양반은 응낙할 수밖에 없었다.

  혼례는 이튿날 바로 치러졌고, 노모는 아들들에게 엄중히 명령하여 양반과 손녀 내외가 서울의 집까지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해마다 많은  재물을 보내어 그 집안의 살림을 도왔다. <『청구야담(靑邱野談)』3)>


  이 이야기 속에서 젊은 양반은 두 번씩이나 목숨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다. 극한에 다다른 대립과 갈등의 상황이다. 그러나 상하의 의리라고 하는 도덕 규범이 사태가 극단적인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제어하였고, 궁극에 가서는 혼인이라고 하는 연고를 맺음으로써 화해적인 결말을 이끌었다. 이 이야기 속에서는 아무도 손해 본 것이 없다. 선대에는 재상을 배출했을지언정 빈한한 처지로 몰락한 양반은 부유한 첩실을 얻어 가계를 풍족하게 할 수 있었고, 재물을 모았을지언정 혈통을 감추고 살아야만 했던 노비의 후예들은 서울의 명문가와 혼맥을 맺었으니 과거의 신분에서 벗어나 양반 사회의 일원으로 행세할 수 있는 유용한 간판을 얻게 된 것이다.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서로가 이득을 보는 절묘한 윈-윈(Win & Win) 전략이라 아니할 수 없다.

  조선 후기에서 일제시대까지 양반집 사랑이나 시정의 이야기꾼들 사이에서 수도 없이 오갔던 이러한 이야기들은 조선 사회가 달라져간 실상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조선 사회의 상층부를 차지하고 있던 양반 사대부들은 그들의 기득권을 포기할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양반들이 가진 것을 빼앗거나 그들을 몰락시키기보다는 열려진 틈새에 파고들어 자기들도 그 반열에 끼기를 추구했던 하층민들의 노력은 결국 극단적인 대결을 피하고서도 얻을 것을 얻어내는 위업을 이룩했다. 그것은 강상(綱常)의 윤리를 지존의 것으로 받드는 성리학(性理學)의 도덕 지상주의가 이룩한 위업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성리학은 사회 각 계층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가운데에도 서로가 손해보는 것 없이 다 같이 승자가 될 수 있는 지혜를 제공한 것이다.


2.


  흔히 조선시대의 성리학, 특히 후기의 교조화된 정통 성리학은 사회 현실과는 동떨어진 공리공론이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그 비판은 이른바 조선 후기의 사회 현실이라고 하는 것을 동시대의 서구 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근대 지향 내지는 탈봉건의 조짐들이 나타나는 사회’라고 섣불리 상정해 버린 데서 내려지는 비판의 성격이 강하다. 나의 관견(管見)으로는, 조선 후기에 하층민들이 주도해 간 사회적 변화는 분명히 있었으되 그 변화의 지향처는 서구적 근대화의 개념에 상응하는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이 아니라 현재의 체내 내에서의 더 고급스럽게 인정받는 ‘윗자리’에 다다르는 것이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 현실의 변화는 그 시대의 공인된 정신적 지도 이념 ‘성리학’의 이론의 변화와 궤적을 같이 한다고 생각한다.

  존재의 근원에 대한 문제에서부터 인간의 감정의 발현 문제까지를 꿰뚫는 성리학의 대표적인 이론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다. 성리학에서 이(理)는 자연 만물의 존재 원리라고 이야기되지만 그것은 실은 인간이 스스로 어떤 존재이고 싶은 이상적 열망을 객관 세계에 투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자기 내면에 궁극적으로 구현하고 싶은 완성된 인격인 것이다. 성리학자들은 그 이를 우주적인 원리로 투영함으로써 기독교의 신과도 같은 지존의 지위를 부여함과 동시에 그 이가 모든 사물 속에 내재하여 그 사물의 본성을 이룬다고 하였다. 이 이론은 인간 개개인이 우주의 근본 원리에 짝하는 완전한 인격을 가져야 하는 당위성과 그러한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 사회에서 대부분의 인간은 이기심과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있어 그 고결한 본성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는 점을 성리학자들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문제를 성리학자들은 기(氣)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설명하였다. 기는 이의 이상을 현실 속의 존재로 형상화하는 데 필요한 질료와 에너지의 공급원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수육(incarnation)의 논리를 빌어 설명한다면, 신으로부터 내려온 예수의 영(靈)은 이가 될 것이고, 마리아의 몸에서 제공된 뼈와 살은 기가 될 것이다. 기독교에서 영(靈)과 육(肉)의 결합으로 인간의 모습을 가진 신이 탄생했다고 하듯이, 성리학에서는 이(理)와 기(氣)의 결합으로 구체적인 자기 모습을 가진 자연 만물이 생성되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기라고 하는 것은 순수한 이와는 달리 유한하고 불완전하며 무수한 차별성을 갖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기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자연만물은 형태와 성질이 다르며, 비교적 순수한 기를 얻어 만물의 영장이 된 인간들도 그 안에서 덕성의 차이를 갖게 된다고 한다. 인간은 무차별적이고 완전한 본성을 보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의 차별성으로 인해 현실적인 우열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성리학적 인간관의 기본 전제이지만, 그 이론은 이 단계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순수한 본성을 제약하는 불순한 기가 인위적인 노력에 의해 교정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인간 사회가 예교(禮敎)로 이끌어져야 하는 이유가 그 점에서 찾아지게 되는 것이다.

  성리학의 이러한 이론은 유교 경전에 대한 소양을 바탕으로 예교의 훈련을 쌓은 양반 사대부들이 중앙정부와 지역사회에서 지배적인 권력을 갖는 것을 성공적으로 합리화하였다. 양반 사족(士族)이 행정 실무를 담당한 아전 서리들이나 생산직에 종사한 상민․노비들보다 우월한 사회적 지위를 점할 수 있었던 명분은 학문 연마와 심성 수양을 통해 보편적 이상인 이(理)의 본연에 좀더 접근한 인격을 보지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기를 확연하게 구분하는 주자 성리학 본래의 이원론적 사고는 신분간의 차별성과 상명하복(上命下服)의 당위성을 이론적으로 합리화시킴으로서 그 사회의 신분질서를 견고하게 유지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 국민들이 화폐에 찍어 주머니 속에 모시고 다니는 초상화의 두 주인공,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그와 같은 성리학 이론을 조선 사회의 지도 이념으로 정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들이다.

  그런데 후기로 들어오면서 사족(士族) 학자들의 성리학 이론, 특히 조선 후기 성리학의 주류를 형성한 서울지역의 낙론계(洛論系) 기호학파(畿湖學派) 성리설 속에서 미묘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엄정했던 이와 기의 구별이 모호해지면서 그 두 가지가 일체시되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의 상대자인 기는 본래부터 양면성을 갖는 것이었다. 기는 이의 실현을 돕는 보조자임과 동시에 이의 이상을 가로막는 방해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 성리학에서는 기의 속성 중 후자보다는 전자의 의미가 강하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기는 본래부터 순수하여 이와 한 몸을 이루는 것임이 강조된 것이다. 이러한 이론의 변화는 ‘인간 개개인에게서나 현실 사회에서 이의 이상을 이룩하는 것이 그렇게 지난한 일이 아니며, 인간 누구나가 자발적인 의지로서 도덕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조선 후기 성리학에서 기에 대한 평가가 전기 이론에 비해 훨씬 긍정적인 것으로 돌아선 것에 관해서는 우리가 자칫 착각하기 쉬운 점이 있다. 기의 본래적 속성이었던 다양한 차별성이나 인간의 생리적 욕망과의 직접적인 관련성 등이 우호적인 평가를 받은 것은 결코 아니고, 오직 그 기가 이의 순수성을 실현하는 능동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을 강조하여 긍정적 평가를 내린 것이다. 이 점은 서양의 근대 정신과 다를 뿐 아니라, 가까운 중국에서 동시대에 일어났던 철학 사조, 이른바 청대 기학(淸代氣學)이라고 하는 왕부지(王夫之)․대진(戴震) 등의 기철학하고도 다른 면모를 보인다. 조선 성리학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기는 욕망이나 개성과 같은 본래의 의미에서 초탈하여 이처럼 된 기, 즉 도덕적으로 순화된 기인 것이다.

  이기일물설(理氣一物說)에 접근한 조선성리학의 이론을 사회철학에 적용한다면, 인간은 신분과 환경의 제약에 무관하게 도덕실천의 능력을 동등하게 보지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이것은 일면 신분의 차별을 공고히 하려 한 양반 사대부들의 의지에 반하는 결론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결론의 반작용을 염려하기에 앞서 성리학의 도덕율이 사회 전반에 확산되기를 희구하였던 사대부 성리학자들의 의지는 자기들의 철학으로 하여금 그 같은 변화의 길로 접어들게 하고 말았던 것이다.


3.


  조선 말기로 가면서 견제 세력이 소멸된 세도정치의 와중에서 제도가 문란해지고 갖은 사회적 파행이 노정되었으나, 유교의 예속은 사회 전반에 걸쳐 더욱 넓고 깊게 확산되어 갔다. 지도자들이 부패하고 제도가 문란해져 가는데, 민간의 예속이 강화되어 갔다면 그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모순적인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일 수 있는 이유는 제도의 문란이 하층민의 지위 상승의 틈새를 넓혀 주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들이 ‘이제는 나도 양반’임을 자처하기 위해서는 양반들과 동일한 생활 신조를 가지고 그것을 준행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는 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 하층민들은 유교의 예속에 동참하면서 ‘인간의 도리’에 더욱 가깝게 접근했다는 점에서 자신들도 양반 사족이나 다름없는 존재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으며, 문란해진 법제의 틈새 속에서 실제로 자신의 생활 행태를 사족들과 동일한 모양의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한 것이다.

  만일 양반의 지위라고 하는 것이 서민들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것이었다면, 서민들은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자기 실현의 길을 발견하고 거기에 매진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중인들이 연마한 외국어, 의약, 법률, 회계 분야의 실무 능력, 쌀 한 톨이라고 더 거둬들이려 한 농민들의 근면, 소박한 형상 속에 물건의 기능성과 절제된 미를 함께 구현해 낸 장인들의 손 기술이 가지는 가치를 스스로 먼저 인정하고  남들에게도 인정받게 하려는 시도를 기대할 수도 있으련만, 그러한 시도는 끝내 사회의 가치관을 바꾸는 수준으로까지 성장하지 못하고 현 체제에서 모든 인정(認定)을 독점하는 양반의 신분에 합류하겠다는 열망에 무화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이 모든 면에서 꼭 부정적었던 것만은 아니다. 강요된 규범이지만 그것을 수용하고, 그것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면 언젠가 그 사회의 주역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다는 희망. 판을 깨뜨리려는 모험주의에 투신하기보다는 인내 속에서 기회를 엿보는 지혜. 그러한 사고가 조선 민중들의 강인한 생활의식의 기반을 이루게 하였고, 결국 그의 후손 누구나로 하여금 ‘나는 누구에게도 뒤쳐질 수 없는 양반’이라는 자긍심 내지는 삶의 목표를 갖게 하였다.

  조선시대의 서민들이 양반가의 예교를 모방하면서 관념적인 지위 향상을 추구했던 것은 현대 사회의 가치관의 모범적인 예시라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과거의 역사 속에서 다져 온 그와 같은 지위 향상의 욕구가 현대 한국의 국가적 부를 창출한 동인이 되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또한  위정자의 부패와 무능으로 야기된 혼란 속에서도 우리 사회를 극단적인 파국으로 치닫게 하지 않게 하고 계층간의 화해를 유도하게 하는 요인이기도 했다.


4.


   현대 한국의 전통주의자(traditionalist)들은 지난 반세기 동안의 근대화 과정 속에서 우리의 옛 모습을 너무도 많이 잃어버렸다고 개탄한다. 그러나 전통시대에 형성된 한국인의 전통적 가치관은 그렇게 쉽게 소멸될 정도로 허술한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근대화의 이름으로 우리가 이뤄온 것들도 실은 조선시대 말까지의 우리 사회에 쌓였던 토대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야 할지 모른다. 현대 한국의 사회 질서를 지탱해 주고 있는 대들보는 해방 이후에 제정된 법조문들이 아니라, 예의 염치를 외면하지 못하는 서민들의 전통적 윤리 의식이다. 우리가 산업화를 통해 이룩한 물질적인 풍요도 어떤 면에서는 전통시대에 이미 하층민들에게까지 확산된 지위 지향적 사고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가족 나의 자식이 이 사회의 밑바닥에 남아 있게 할 수는 없다고 하는 지위 향상의 염원은 어느 선진국에서도 유례를 볼 수 없는 근면성과 교육열을 이끌었던 것이고, 그것이 지난 20 년간 한국의 경제에 역동성을 불어넣은 중요한 요소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민들의 지위 상승 욕구에 편승한 경제 발전은 그것이 합리성과 실질 추구의 가치관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건전한 산업 지반을 형성하는 데 한계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생산 활동에 종사하면서도 자신의 일에 첫 번째 가치를 부여하지 못하고 그것을 사회적 지위 향상으로 수단으로만 여기는 사고 속에서 산업 사회가 요구하는 합리성․효율성은 보양되지 못한 반면, 기득권자들의 자기 보호를 위한 연고주의는 서민들 사이에서조차 엄정하게 비판받기보다는 나도 언젠가 그 유대 속에 합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속에 묵인되곤 했다.

  스스로 오천 년 역사를 자부하는 한국 민족. 우리에게는 분명 다른 사회가 갖지 못한 저력과 장점이 있다. 하지만 그 저력과 장점은 우리를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기도 하다. 장점과 단점이 별개의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 20여 년간의 우리의 눈부신 경제 성장을 가능케 한 원인으로 지목된 유교 사회의 전통적 덕목들이 IMF 체제 이후로는 부패와 무능을 만연시킨 병균으로 비판받는 사실이 그 일례이다. 전통에 뿌리를 둔 한국사회의 고유한 사고방식이 미덕이냐 악덕이냐를 판가름할 절대적인 기준은 어디에도 있지 아니하다. 보다 중요한 사실은 아무리 그것들이 비판받는다 하더라도 한국인들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예로부터 이어져 온 그 모습을 쉽게 버리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건설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 로마가 하루저녁에 망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아는 조선 사회의 모습은 대체로 유교의 의한 예속화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된 18세기 이후의 모습이다. 그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심지어는 조선 초기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지만, 그것이 역사에 남는 전통시대의 모습으로 되기까지는 수백년에 걸친 나름대로 그 시대에는 최선이었다고 할 노력의 결집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오늘의 현실에 맞지 않아 송두리째 쓸어버리려 한다 해도 그 해체는 일 이십 년 새에 이루어질 일이 아니다.

  쉽게 변화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존재 양식을 오늘의 현실에 조화시키는 것은 우리의 전통에 대한 거짓 없는 인식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우리 모습이 잊혀져 간다는 피해 의식 속에서, ‘우리 것은 좋은 것’임을 강변하는 것은 전통과 현대의 조화라는 숙제에 바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현대 한국 사회의 전통주의자들이 행한 과오 중의 하나는 우리 전통 사회의 모습 전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보다는 빛깔 좋은 면만을 추려내어 보이려 한 데 있다고 생각한다. ‘봉공멸사(奉公滅私)의 의식에 투철한 선비 정신’, ‘물질에 대한 무한 욕망에 스스로 제동을 걸 줄 알았던 도덕 지혜’, ‘자연과 친화를 도모한 환경 애호 정신’  그러한 것들은 우리의 전통시대에 존재했던 미덕들이다. 그렇지만 비판론자들이 그 똑같은 사실을 가지고 ‘억압적 지배 이데올로기’, ‘부패와 무능을 가려 온 허위 의식’이라고 비평하기도 한다. 그것들은 사실상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다. 아름답지 않은 한 쪽 모습을 가린다고 해서 다른 한 면만 남게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한국인의 전통적 가치관이 어떠한 점에서 현대 산업 사회의 당위에 부합하지 않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과거를 비판할 때에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성취의 많은 부분이 그 전통적 가치의 토대 위에서 이룩되었다는 사실, 우리들이 경제적, 정치적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전통적 가치관에 교묘히 기대어 해결을 도모해 왔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기대고 있는 것과 비판하는 것이 동일한 하나의 실체임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이중 논리의 모순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역사와 전통은 결코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단절된 것이 아니며, 오늘의 우리에게 그러하듯이 다음 세기의 사이버 세대들에게도 여전히 자기의 한 부분으로 남을 것이다. 자기가 무엇에 의지하고 있고 무엇에서 벗어나려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들도 과거의 역사를 돌이켜 보고 새로운 해석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조선시대의 한문 전적들을 정리하고 그것을 데이터베이스로 편찬하는 일에 하루하루를 바치는 이유는 한국인의 삶의 자취를  알려 주는 기록들이 정보 통신이라고 하는 새 매체에 적응하지 못하고 우리의 지식 세계에서 퇴출당할 경우, 우리의 후배들은 자기 사회가 형성되어 온 모습을 비춰볼 거울을 잃어버릴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현  약력:


1959년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대학원,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철학을 전공, 조선 후기 성리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시스템공학연구소에서 선임연구원, 뉴미디어정보시스템연구실장을 역임하면서 동양 고전 문헌의 전산화 기술을 개발하였고, 현재는 서울시스템(주) 부설 한국학데이터베이스 연구소장으로 있으며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직을 겸임하고 있다. 『국역 조선왕조실록 CD-ROM』, 『고종․순종실록 CD-ROM』 및 한국의 예술, 문헌 등에 관한 다수의 CD-ROM과 온라인 데이터베이스를 편찬하였고, 현재 한문 문헌 표점 및 전산화 규칙에 대한 연구와 『한문원전 조선왕조실록』 데이터베이스 개발을 수행하고 있다. 저서로『任聖周의 生意哲學』, 『조선유학의 자연철학』(공저) 등이 있다.




1)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의 명부


2) 조선 후기 중인 신분의 문인 유재건(劉在建)이 편찬한 책.  중인 이하 상민, 노비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상진(李相鎭)의 번역이 있다. (1996, 자유문고)


3) 조선시대 순조 말년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편자 미상의 야담집. 이월영(李月英)․시귀선(柴貴善)의 완역본이 있다. (1995, 한국문화사)